교회 사명 및 비전 & 우리의 신앙 고백

사명 선언문 (Mission Statement)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교회 마태복음 22 장 37- 39

비전 선언문 (Vision Statement)

예수님의 마음(Heart)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 (빌립보서 2:5)

H – Honoring God

주은혜 교회는 삶을 통해 하나님만을 높이며 영광돌리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공동체”입니다.

E – Equipping Christians

주은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며 사랑하며 섬기는 “훈련공동체”입니다.

A – Awakening the Next Generations

주은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여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준비시키는 “비전공동체”입니다.

R – Restoring the Families

주은혜 교회는 이민가정의 문제를 예방하고, 어려운 이민생활로 인해 상처 받고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며 회복하는 “사랑공동체”입니다.

T – Taking the Gospel to Others

주은혜 교회는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으로 이웃으로 이웃에서 세계로 복음을 들고 나가는 “복음공동체”입니다.

* 주은혜 교회는 과업을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닌 각 사람의 인격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입니다.

** 모든 모임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한 영적 성장을 위한 훈련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더욱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 갈수 있도록 함께 배우며 나누며 선포하는 주은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Christian Reformed Church 북미주 개혁 교회 

우리의 신앙 고백

우리는 북미주 개혁교회가 고백하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그 외에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 도르트신경(1618), 벨직신앙고백(1561), 사도신경, 아타나시안 신경, 그리고 나이시안신경(니케아)에 우리 신앙고백의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심을 믿습니다. 한마디로 아래로 요약되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01.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02.우리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동시에 완전한 신성을 믿습니다.
03.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 하심과 위로하시는 사역을 믿습니다.
04.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믿습니다.
05.우리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습니다.
06.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구세주로 믿으며 그 믿음을 통하여 의인됨을 믿습니다.
07.우리는 영원한 생명(영생)과 영원한 형벌(영벌)을 믿습니다.
08.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09.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말씀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습니다.
10.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공에 제한 받으심이 없이 인생 속에 깊이 개입하심을 믿습니다 (섭리).
11.우리는 거룩한 성례(성찬과 세례)를 믿습니다.
12.우리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로 믿습니다.

우리 교단의 신학적 특색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원하시면 아래의 내용을 읽어보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koreancrc.com    북미주 개혁 교단 한어 사역부

crcna.org    교단 홈 페이지

북미주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이하 CRC)로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우리의 위치를 바로 찾기 위하여 필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가 누구였고,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하나의 교회로 규정짓는 일을 도운 사건들이 무엇이며, 또한 우리를 이제까지 이끌어온 가치와 원리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요구하고 있다. CRC 이사회가 사역계획(Ministries Plan)의 준비를 지시했을 때 동 이사회는 또한 교단의 정체성에 관한 선언문도 만들 것을 요청했다. 본 문서는 이러한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선언문은 CRC 이사회와 2002년 총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이제 이것은 토의를 위한 자료로서, 그리고 필요할 경우, 현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하여 교회들과 성경연구 모임, 문의하는 사람들과 CRC의 각 교인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 가운데 현재는 우리의 다양성을 축하하고 강화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다양한 배경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사람들은 교단의 교제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 교회는 문화적, 신학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공동체를 형성해온 비전과 사명이 있다. 이러한 역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 오늘날의 CRC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심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이 선언문을 여러분에게 제공하는 바이다. “이 모든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2002년 10월
북미주 개혁교회
교단 사역 총무
피터 보그돌프(Peter Borgdorff)

목차 내용

서론
개혁주의의 강조점
우리 교회의 계보
개혁주의의 세 가지 접근 방법
교리주의자의 강조
경건주의자의 강조
변혁주의자의 강조

이 정체성 선언문의 목적은 “개혁주의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다. 개혁교회를 포함한 북미주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질문의 가치와 함께 심지어는 이러한 질문이 적절한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북미주 기독교에서는 신자들을 연합하는 것에 강조를 두고있지, 그들을 같은 신자들로부터 구분하는 일은 강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주 옳은 일이다. CRC는 종종 다른 기독교인들과의 연합보다는 자신들을 그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교회가 하나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으며(요한 17:27), 바울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전 12:12, 엡 4:4-6). 어떤 교회가 바울의 위대한 부름인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보다 나은 사명과 비전 선언을 원하거나 필요로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연합시키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의 대적은 루터교인, 감리교인, 또는 순복음 교인 등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북미 교회의 주된 대적은 모든 신자들을 위협하고, 또 그것에 대항해서 우리 모두가 공통의 믿음과 행동으로 대항해야 하는 세속주의이다. 실로 CRC는 이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른 기독교인들과 손을 맞잡아 왔다. 지역 교회들은 종종 음식 배급소와 학습지도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에 다른 교회들과 함께 일을 해왔으며, 교단 소속 단체들은 다른 교회나 다른 종교 기관들과 전 세계에 걸친 사역을 종종 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개혁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 정체성 선언문을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특성”(accent)이라고 불리는 것, 즉 신학적인 강조점을 가지고 말을 한다. 실상 이러한 특성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의 말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뉴올리언스, 핼리팩스, 브루클린, 그리고 위니펙의 사람들을 모아서 똑 같은 발음으로 말하라고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언어가 그 본질상 지역에 따라 발전하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표현하는 특정한 방편을 발전시키며, “문화”란 공동의 경험, 의미, 그리고 삶의 방법 등을 포함한 이러한 특성들을 쌓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인간 공동체의 개성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존재하는 놀라운 다양함의 일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일하고 예배 드리면서 특정하게 말하는 방편들을 발전시킨다. 따라서 순전하고,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기독교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의 믿음과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특정한 방법을 개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점들이 서로의 마찰과 소외를 가져온다면 그 때는 건전한 차이점들이 죄악된 분열이 되어버리겠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특정한 신학적인 강조점을 가지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매우 성경적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몸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교회의 단일성(한 몸)과 다양성(손, 발 및 눈)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장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즉 성경적으로 건전한 교회는 깊은 일체감과 함께 풍성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심오한 성경의 가르침 중 하나는 “하나와 여럿”(one and many)의 진리이다. 삼위의 하나님 그 자신도 하나이면서 셋 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신자들 또는 다른 그룹의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 된 것이나 분열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 이해는 몸에서 특정한 손, 발 또는 눈을 강화시키듯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연합된 증거 가운데 몸 전체를 강화시킨다.

때때로 사람들은 “개혁주의”나 “명백한 개혁주의”를 불과 몇 사람에 의해서만 언급되는 신학적 강조점으로, 그리고 그 강조점이 보다 폭 넓은 기독교회와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것같이 사용하곤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개혁주의의 강조점은 CRC나 CRC의 특정한 역사보다 훨씬 큰 것이다. 개혁주의는 헝가리, 한국, 인도네시아, 스캇트랜드, 그리고 마다가스카르를 포함한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성하고 있으며, 여러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중 하나에 불과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3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더욱이 CRC자체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어서, 주일에 CRC 회원들은 적어도 14개의 다른 언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더욱이 개혁주의 기독교는 우주적인 교회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혁주의 기독교는 신약시대의 교회에 근거를 둔 보다 폭 넓은 기독교 정통주의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모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 하나님과, 그 중 제 2위께서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하셨음과, 제 3위께서 성령으로 교회에 내재하심을 믿는 신앙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연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 이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 그리고 영광 중의 그리스도의 재림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게 됨을 인정한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우주적인 교회와 함께 사도신경의 말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다.

이 정체성 선언은 개혁주의 전통의 특정한 강조점 일부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지만, 많은 인종, 교단, 및 세대를 초월하여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려고 한다. 이러한 포괄적인 개혁주의적 관점의 표현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개혁주의의 관점이 CRC의 연합과 목적을 위한 지속적인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개혁주의 전통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은 폭 넓은 기독교회의 가계에서 개혁주의 계보를 찾는 일이다. 아래의 간단한 표는 어떻게 기독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해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요 기독교 교회
1~11세기    기독교 교회
11세기         서방 가톨릭 동방 정교회
16세기         개신교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 교회
16세기          재세례파    개혁주의     루터교     성공회
17세기          퀘이커 청교도
18세기          감리교
19세기         자유교회
20세기         순복음

기독교 교회는 서방 교회(로마 캐톨릭)이 동방 교회(정교회)로부터 분리된 11세기까지 연합되어 있었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로마 캐톨릭 교회에 불어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졌으며,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중심적인 메시지, 즉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에서 네 개의 주요 줄기인 제세례파, 개혁주의, 루터교, 그리고 성공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네 개의 줄기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배치된 위치와 순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왼편으로 갈수록 로마 캐톨릭과의 단절이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예배의 형식과 관련하여 이 표는 보다 덜 형식을 따르는 데(왼편)서부터 보다 형식을 따르는(오른편) 순으로 되어있으며, 성례에 대해서는 성례가 예배에서 덜 중심적인 교회로부터 보다 더 중심적인 교회의 순이며, 교회 정치와 관련해서는 보다 덜 계급적인 교회로부터 보다 더 계급적인 교회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에 근거를 둔 교회 중에서 개혁주의의 관점은 흔히 폭 넓은 중간 지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위치를 북미 개신교의 계보에서 찾으려고 할 때, CRC에서 발견되는 개혁주의의 관점도 오늘날의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중간 지점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이 있게 된다. 어쨌든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초자연주의에 관해서는 과감하게 근본주의와 그 믿는 바를 함께 하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 문화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조를 같이 하지 않는가.

그러나 CRC로 발전된 개혁주의의 전통은 이러한 북미에서의 두 양극을 잇는 연속선에 잘 조화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 반 초자연주의, 개인적인 죄와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언급을 꺼려하는 자유주의로부터 그들 자신을 강력하게 구분한다. 그러나 또한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반 지성주의와 창조 교리에 대한 강조의 부족에서 연유하는 과학과 학문에 대한 의심, 문화적인 참여의 부족,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세대주의적 역사 이해에서 기인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하는 경향 등을 가진 근본주의로부터 그 자신을 구분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의 관점은 자유주의 및 근본주의로부터 완전히 구분되며, 따라서 그 자신을 북미의 문제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 제 3의 입장을 나타내왔다. 개혁주의는 무엇보다도 그 입장이 (자유주의자나 근본주의자와는 달리) 논쟁에서 취했던 입장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칼빈(John Calvin)과 종교개혁자들 및 어거스틴에 기초한 신학전통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규정된다.

북미 계보에서 개혁주의의 줄기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방법은 복음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주의자”(evangelical)라는 용어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북미에 800만이 있는 복음주의적 루터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할 때 그들은 정통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주류에 속한 역사적 개신교단으로서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은 매우 가능하며,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는 서로의 의미가 매우 다른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라는 단어들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란 말은 그들 자신을 근본주의와 구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는데, 종종 개혁주의 신자들이 그들 자신을 근본주의와 구별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에서 상당히 중복되는 부분이 있음을 종종 지적해왔다. 풀러 신학교, 고든 칸웰(Gordon Conwell) 신학교, 위튼 대학교, Christianity Today,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과 같은 기관들과 스탓(John Stott), 패커(J. I. Packer), 콜슨(Chuck Colson) 같은 인물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입장이 개혁주의는 아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의 상당 부분에 있어서 자신들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라고 간주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개혁주의의 사람들도 분명하게(그리고 옳게)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개혁주의 전통을 관찰한 사람들은 북미의 문화적 환경에서 번성하게 된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의 주된 “강조” 또는 “정신”을 지적해왔다.

그 첫째 강조 또는 정신은 교리주의자의 그것이다. 이 관점에서의 “개혁주의”는 주로 성경에서 가르치고 교회의 고백에 반영된 기독교의 어떤 가르침에 대한 강한 지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교리주의자의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며,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개혁주의 교리를 자세히 요약한 “조직신학”의 저자인 벌코프(Louis Berkhof) 같은 인물을 특별히 높이 평가한다.

둘째의 강조 또는 정신은 경건주의자의 그것이다. 여기에서 “개혁주의”란 신자의 삶과 사람이 하나님과 갖는 개인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그리고 경건주의자의 질문은 “매일 우리의 믿음의 걸음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는가?” 이며, 네델란드의 목회자로서 1834년 신학적 및 영적 활력을 잃어버린 국가 교회로부터의 탈퇴(Afscheiding)를 주도한 칵(Hendrik de Cock)과 같은 인물을 특별히 높이 평가한다.

셋째의 강조 또는 정신은 변혁주의자의 그것이다. 이 관점에서의 “개혁주의”는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문화를 변혁시키는 요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변혁주의자의 질문은 “어떻게 복음을 세상에 연결시킬 것인가?”이며, 목회자, 학자, 그리고 네델란드의 수상으로서 기독교 문화의 발전을 강조하고 북미 CRC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1880년대의 돌린치 운동(Doleantie movement)을 주도한 카이퍼(Abraham Kuyper)와 같은 인물을 특별히 인정한다.

물론 이 세 가지 강조 또는 정신은 서로 중복되는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단호하고 성급한 구분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그 역사 및 관념 상 서로 분명하게 다른 세 개의 접근방법을 대표하고 있으며, (이후에 나오는 대로의) 개혁주의의 특성을 요약한 16개의 핵심 단어 또는 구문을 보여주는 체계를 제공하고 있다.

1. 성경 (딤후 3:16)

개혁주의 신자들은 성경에 대하여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영감되었으며, 무오하고,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아래의 두개의 성경구절은 성경의 본질과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27)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젓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영감된,” “무오한,” 그리고 “권위 있는”은 개혁주의 신자들이 성경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세 개의 단어이다. “영감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근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성령에 의하여 인간 저자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무오하다”는 것은 성경이 참되며 믿음과 실천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틀림이 없어서, 그 가르치고자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요구를 가리킨다. 즉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밑에” 살며, 따라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종교개혁 동안에 개혁주의 신자들은 성경, 전통(교회의 가르침), 그리고 공식적인 교회의 선언이 모두 동일하게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로마 캐톨릭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를 주장했다. 로마 교회의 주장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만이 믿음과 삶에 있어서 우리에게 권위를 갖는다고 응답했던 것이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에 가장 강한 위협이 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성경의 권위 수준으로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을 끌어 내려 성경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못하고, 부활 같은 것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고, 성경이 우리 삶에 권위를 갖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이에 대하여 신자들은 현대의 “계몽된” 사람들에게 제아무리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자신들은 성경이 우주의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편임을 믿는다고 답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에 또 하나의 위협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것을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계시에 대한 견해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내적으로, 그리고 독특하게 계시하셨다고 간증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또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함께 일하는 사실을 주장한다. 칼빈 신학교의 교수였던 스톱(Henry Stob)이 간명하게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은 언제나 성경의 등을 타고 다닌다.” 또는 버나드 끌레보(Bernard of Clairvaux)가 말했듯이 “성경은 성령의 저장소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메시지에 대한 언급이다. 우리들은 때때로 성경의 본질과 권위에 대한 논쟁에 너무 빠져들어서 그것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나칠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풀어야 할 문제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극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이야기의 절정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은 “구원의 계시”에 있다 라고 교회가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2. 창조-타락-구원 (골 1:15-20)

창조-타락-구원은 개혁주의가 성경과 그 메시지를 정리하고 이해하며 또한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편이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세상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고 또한 구원하고 계신데, 이 구원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날에 완성된다는 내용이다.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젊은 사람들이 믿음의 고백을 하러 나올 때 기뻐한다. 그런데 면담을 하는 중에 젊은 이들은 보통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 때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생을 위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포함하는 답변을 좋아한다. 그리고 개혁주의 목회자와 장로들은 이러한 질문에 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처음에 하나님이 처음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후에 세상이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라고 대답할 때 더욱 기뻐한다. 이와 같이 창조-타락-구원은 개혁주의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방편으로서, 역사와 성경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창조 교리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후에 더욱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라는 성경 가르침의 중요성을 언급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 (창 1:26-2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26절) 서로 사랑하는 교제 속에 살라는 명령을 행할 때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 서두에서 말하는 대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게 될수록 자신에 대하여 더 알게 되며, 그들 자신에 대하여 더 알게 될수록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다는 진리는 낙태, 성, 결혼, 학대, 사형, 전쟁, 인종, 그리고 불구자 등을 포함하여 교회가 취하는 윤리적 입장 거의 모두에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인류의 창조 교리보다 교회의 윤리적 진술에 보다 더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성경 교리는 별로 없다. 우리는 “신묘막측하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시 139:14).

3. 은혜 (엡 2:8-10)

은혜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를 말한다. 은혜는 그것을 얻을 만한 아무런 일을 할 수 없고 오직 선물로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이며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이 마침내 어떤 것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아버지를 움직여 잃어버린 아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도록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좀 더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놀라운 진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역사를 통하여 개혁주의 사람들은 은혜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인간의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선물인가를 강조해왔다. 실로 바울이 말한대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8-10)

“칼빈주의 5대 강령”은 하나님 은혜의 철저한 성질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의 교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각 단어의 앞 문자를 따서 만든 “TULIP”(완전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요약되곤 한다. 그런데 이 “TULIP”는 종종 인간의 실패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 중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며, 그 배면에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성경 중에서 가장 풍성한 가르침의 일부인 것이다: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 모든 인간과 인간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부패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외하고는 무기력하고 소망 없이 되어버렸다. 바울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인간은 단순히 약해지고, 병들고, 또는 불리한 입장에 처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은 죽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 무조건적인 은혜(Unconditional Grace) : 하나님은 그의 긍휼 가운데 출생하기도 전에, 그리고 실로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신자들을 선택하여 사랑 가운데 그 자신에게로 부르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 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은 누가 믿을 것인가를 미리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 로” 그의 자녀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누구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하며, 하나님이 영원부 터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신자 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요 3:5), 또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라고 말씀하셨다(요 6:44). 물론 믿음은 인간의 행위요 결정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 하나님은 그의 능력에 의하여 신자를 그의 손에 안전하게 붙들고 계시며, 어느 누구 또는 어느 것도 신자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안전하게 붙들려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들을 붙잡고 계신 것이다. 이 사실은 신자의 영원한 안전함, 즉 성도의 견인이라고 불려져 왔다. 바울이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말했듯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절) 칼빈주의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관하여 말할 때, 그들은 그들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일인가를 깨닫고는 말을 잃는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은혜로서, 찬송가의 가사대로 우리는 그저 “빈 손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다.

4. 언약 (Covenant. 렘 31:31-34)

언약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갖는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풍성한 성경적 개념 중의 하나이다. 언약이란 약속과 책임을 반드시 동반하는 양 편 사이에 맺은 공동의 협약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특별히 구약이 거듭해서 하나님을 그의 백성을 향한 약속, 책임, 언약에 묶어두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 어떤 것도 약속하실 필요가 없지만, 그는 거듭해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과 맺는 위대한 언약에 매달려있다. 더욱이 성경은 이 하나인 은혜의 언약 주위에 연합되어 있다. 다른 교회에서보다 개혁교회에서 구약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듣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개혁주의 설교자는 구약을 신약에 배치된 것으로 보지 않고, 구약과 신약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2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에까지 미치는 하나의 은혜 언약을 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과 헌신으로써 묶어 놓는 언약의 개념은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이해를 돕는 풍성한 개념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약속을 우리에게 새롭게 하시며, 우리는 우리의 언약의 맹세를 하나님께 새롭게 드린다. 설교는 하나님 언약의 약속들을 선포하고 제공한다. 성찬은 새 언약의 표식이다. 세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실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교우들은 하나님과 서로에게 약속을 한다.

이런 약속들은 함께 두터운 헌신의 망, 교회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알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연결을 형성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참여할 때, 그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하나의 단체의 명단에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신자들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교회 회원의 자격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교회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은 교회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이러한 풍성한 언약적 연관의 망과 헌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므로 매우 중대한 일이다.

또한 언약은 현대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교회를 위한 중요하고도 전략적인 강조점이 될 수 있다. 윤리와 성격이 어떻게 개발되는가를 알아내려고 사회가 필사적으로 애쓸 때, 신자들은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는 일의 핵심적인 역할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약속의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 속에서 언약에 대한 강조를 할 필요가 있다.

5. 일반은총 (Common Grace. 마 5:43-48)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는 달리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인류 전체에게 보편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호의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일반은총에 대한 세 개의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신자들은 물론 불신자들에게도 자연적인 은사를 주셨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나 변호사 또는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있어서 죄를 억제하고 계시다. 죄 때문에 인간은 그들이 될 수 있는 정도로 선하지 못하다. 그러나 또한 일반은총으로 인하여 그들은 악하게 될 수 있는 정도로 악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가 어떤 때는 신자보다도 더 낫게 행동을 하는 것같이 보이는 이유이다. 인내, 용기, 동정심 등의 미덕은 어떤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에게서도 그 영향이 전적으로 상실되지는 않았다. 셋째, 하나님은 불신자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유익이 되는 긍정적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회가 질서 있게 기능을 하도록 기본적인 사회정의에 대한 의식을 보존하신다. 일반은총은 죄와 악으로 상처입고 왜곡된 사회가 전적으로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일반은총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봉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신자들을 향해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실천해야 하는 은혜의 모형이다. 일반은총은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고 공동의 목적을 추구할 때 그들과 긍정적인 접촉점을 발전시키도록 격려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일반은총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 또는 예술 작품들을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 그리고 때로는 초월의 세계 또는 은혜에 대한 암시로까지 보면서 즐길 수 있는 이유이다. 일반은총은 신자들로 하여금 (아브라함 카이퍼가 “대립관계” 라고 불렀던) 이 세대의 마찰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이 싸움은 두 개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영적 권세 사이에 있는 것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권세가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그들 전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은총의 가르침은 교회로 하여금 다양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는 사역의 다양한 목적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음식 공급 사역, 원목의 병원 사역, 목회자의 결혼 상담 등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명의 일부이며, 그것은 심지어 이 사역의 수혜자들이 신자가 아니거나 신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원함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전체적인 사명 아래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 그리고 교회는 한 사역의 가치를 다른 사역의 가치 아래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다양한 것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모든 이러한 사역들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사명 안에서 그 자체의 고귀함과 목적을 갖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교리주의자, 경건주의자, 그리고 변혁주의자로서의) 세 개의 접근방법이 서로 중복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즉 신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매일 믿음의 걸음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가의 세 가지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접근방법은 CRC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교회 안에서도 있는 서로 다른 강조점들을 포착하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롬 8:38-39)

개혁주의의 신자들이 죽게 될 때, 목회자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신앙의 핵심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종종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변,. 즉 “삶과 죽음에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은, 죽음에서나 삶에서나,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라는 답변을 사용한다. 우리 믿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절)

때때로 개혁주의 전통은 “머리,” 즉 바른 교리를 아는 것을 너무 많이 강조하고 “가슴,” 즉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CRC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가장 사랑을 받는 신앙고백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몹시도 목회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의 진술이다. 그러나 교리문답을 변호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인들과 신앙의 전통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와 같이 개방해서 자유롭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경건주의자의 접근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CRC의 모교회인 네델란드에 있는 개혁주의 교회는 국가교회가 매우 자유주의적이 되고 그러한 “가슴의 관한 언급”을 꺼려했기 때문에 국가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가장 개인적인 만남에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개인적인 관계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보지만, 그 사역을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연합 이하의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관하여 신자의 삶의 폭을 지나치게 좁게 만드는 식으로 말하는 미국 복음주의의 경향에 때때로 우려를 갖는다. 신자의 삶은 내적인 애정, 즉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그를 향하여 갖는 나의 감정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내적 상태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에 대한 최선의 평가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별히 내적 행복과 자기 충족의 추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이 치료의 세대를 사는 개혁주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라는 말이 이와 똑같이 중요하며 또한 종종 보다 포괄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편들을 제외하지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 성령 (롬 8:1-17)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세 인격 중 하나이시다. 성경을 믿는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 인격 모두의 사역을 적절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인다. 더욱이 신자는 이 삼위의 인격 각자의 사역, 즉 창조에서의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 구속에서의 아들의 사역, 성화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강조할 뿐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 아들 및 성령의 신적인 공동체로 계시하는 방식을 또한 강조한다. 즉 하나님 자신의 삶과 교제 안에서 신자들은 그들이 갖도록 창조되고 구원된 교제와 자기를 주는 사랑의 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삼위의 교제 안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의 생활 및 증거를 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성령의 사역은 포괄적인 것으로서, 성령은 영적인 생명을 주는 자이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신자를 새롭게 하며, 신자에게 그 자신의 열매, 즉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함, 선함, 온유함, 신실함, 자기 통제 등을 주며, 사역을 강화하도록 교회에게 은사를 준다.

칼빈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모두 성령과 관련된 풍성하고도 활기찬 신학을 제공하고 있다. (어떤 19세기의 신학자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 라고 불렀다) 개혁주의의 고백은 특별히 다음과 같은 성령의 사역들을 강조하고 있다:

– 성령은 신자에게 구원을 얻는 믿음과 영적인 새 생명을 준다.
– 성령은 신자에게 영생을 확신 시킨다.
– 성령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새롭게 하신다(성화의 사역).
–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배합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교회를 모으며, 성령은 그것을 세운다.
–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합시키고,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세례와 성찬에 그리스도의 실 제 임재를 가능하게 하면서 성례 가운데 활발하게 일하신다. 실제로 신자의 예배는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생명과 사역 으로만 가능하게 된다.

너무나 자주 사람들은 성령을 어떤 특정한 경건함 또는 특정하고 특이한 성령의 은사(신유, 방언,예언 등)에만 연관시키려 한다. 그러나 위에서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성령의 사역이 포괄적이라는 사실, 즉 신자의 삶, 교회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 등 모든 방면을 포함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지점에서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기도의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의하면, 기도는 감사하는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자는 감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은혜의 선물과 성령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문답 116). 그런데 성령은 신자의 기도의 주체이며 또한 대상이다. 성령은 신자가 기도를 하도록 힘을 주며, 또한 성령은 기도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풍성하고 생생한 이해는 풍성하고 생생한 기도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동반한다.

마지막으로, 성령과의 풍성하고 생생한 연대는 실상 신자의 예배와 구분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연대로서의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의하여 힘을 얻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성찬과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 라는 개혁주의의 이해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배의 갱신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든지 성령의 사역이다.

3. 감사 (골 3:15-17)

신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신자의 동기를 유발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에 힘을 주는 근본적인 성향은 무엇인가?” 등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 그리고 개혁주의의 강조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죄책감, 공포, 율법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감사이다. 신자의 삶 전체는 하나의 반응, 즉 “감사합니다!”로부터 출발해서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새로운 삶을 설명해나가면서 바울은 감사함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5-17)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향과 행동에 힘을 주는 근원으로서 감사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신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라” 및 “하지 말라”는 것들에 대한 외면적인 일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에 유혹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율법주의는 신자를 그리스도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생활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율법주의적 정신은 감사하는 정신, 감사의 심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때때로 CRC의 경건을 오염시켜왔으며, 이것은 왜곡, 실패, 고백해야 할 죄, 그리고 성경의 중심적인 가르침에 모순되는 일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모든 순종은 감사의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십계명의 가르침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이다. 교리문답의 세 부분, 즉 우리의 죄책,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감사 중에서 십계명은 감사의 부분에 배치되었다. 신자는 그들의 죄책을 없애거나 그들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의 죄책을 없애시고 값없이 구원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순종은 구원을 얻는 방편이 아니라 구원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방편이다.

순종과 감사를 연결시키는 것은 순종이 덜 중요하다거나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감사하게 느껴질 때에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무, 훈련, 소명, 그리고 책임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식이다. 그러나 죄책, 두려움, 그리고 윤리주의는 신자의 삶을 위한 동기 부여자로서는 제한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순종은 궁극적으로 감사의 깊은 우물에서, 즉 감사하는 심정으로부터 흘러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4. 교회 (에베소서 4:1-6)

개혁주의 사람들이 신자의 삶에 대하여 말할 때, 아마도 그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많은 북미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경향은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그리고 내적 애정과 감정으로 그 폭을 부당하게 좁히는 것이다. 이러한 편협한 초점은 이내 너무 내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고 종종 교회와 연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와 성령의 내적 임재가 신자의 경험에서 중요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및 성령과의 관계는 교회, 즉 신자들의 언약 공동체, 하나님께서 모으셨고 또 지금도 모으고 계신 그의 자녀들 안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지상명령 프로그램 가운데서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결코 그 자체를 위해서나 그 자체의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믿음과 제자훈련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베드로는 교회의 정체성을 그 목적과 명확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교회가 그 자신의 안전함 이상의 것을 위하여 살며 자신을 하나님의 사명에 믿음 안에서 순종으로 드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라는 말씀은 개인은 물론 교회에게도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교 목적에 헌신하는 교회는 결국 그 자신의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신자가 속한 교회가 모든 역사와 다양함 가운데 전 세계에 걸친 교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가 공동체로서 인종적으로 다양한 하나님의 백성과 화해 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의와 화해의 사역은 단순히 그것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교회의 임의적인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기본적인 표식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오늘날 북미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교회와 동일시 하는 일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 가운데의 교회나 전 세계의 교회에 신경을 쓸 필요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1980년대에 남가주나 19세기에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즈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다. 각 교회는 그 자체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교회들과 깊은 유대관계에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필요한 교정책은 개인적 성화의 계획을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기를 덜 하고, 반면에 어디서나 그리고 역사 전체로부터의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행위와 관습에 자신을 연결시키는 과정으로 보기를 더 많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계 교회와의 이러한 연대와 전통에 대한 인식은 교회 내에서의 변화와 혁신을 금하지 않는다. 핵심적인 개혁주의 원리는 “개혁주의 교회는 언제나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그 자체도 교회를 철저하게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교회는 언제나 개혁하고 새로워지며, 죽고 다시 일어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사실상 그 정의 그대로 계속해서 성장하며 변화한다.

5. 말씀과 성례 (롬 10:14-15, 마 28:16-20, 고전 11:23-26)

공적인 예배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믿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주요 방편이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이다. 그리고 CRC의 목사들이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위하여 안수를 받는 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이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설교는 단지 설교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강의가 아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성경 낭독과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성령에 의하여 주도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예배라는 상황에서의 설교의 계시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예배에서 성례의 상황이 아니라 말씀의 낭독과 설교의 상황에서 성령의 일하심을 위한 기원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예배의 갱신이 전 세계와 CRC안에서 일어남에 따라서 성례, 즉 성찬과 세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성례에 관해서 말할 때 개혁주의 신자들이 강조하는 두 가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각 성례와 연관된 모든 성경적 주제들을 인식하고 성례를 집행하기 원한다. 금강석이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 면과 각을 가지고 있듯이, 성경에서 각 성례는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세례는 제자도에로의 부름(마 29:19), 구원의 선물(막 16:16), 성령을 받음(눅 3:16, 행 8:16, 10:44-47), 중생(요 3:3), 죄 사함과 씻음(행 2:38, 22:12),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함께 부활함(롬 6:4, 골 2:8), 교회로의 융합(고전 12:13), 그리스도로 새로 옷입음(갈 3:27), 그리고 몸의 연합(엡 4:5)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찬 또한 언약의 갱신(출 24:8), 감사, 죄사함, 하늘 잔치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마 26:26-29), 속죄함(막 14:12), 영적인 공급(요 6:35), 그리스도를 기념(고전 11:24) 및 선포(고전 11:26) 등 많은 성경적인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혁주의 전통은 성례에 대한 이러한 모든 성경적인 방면을 인정하고 집행한다.

성례에 관한 두 번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행위에 개혁주의가 부여하는 중요성이다. 각 성례는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성례에서의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약속하고, 선포하고, 먹이고, 보존하고, 위로하고, 도전하고, 가르치고, 확신 시키는 방법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성례는 예배 드리는 자들만의 일 그 이상의 것이다. 성례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우리를 그에게로 더 가까이 이끄시는 의식이다. 이 성례들은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실제로 우리에게로 오시는 방편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수많은 영적인 것을 만들어 내면서 신비와 초월의 세계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예배에서 더 큰 경외감과 초월적인 체험을 고대하며, 예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실제적이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의 예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간의 위대한 만남을 드러내는 말씀과 성례에 대한 강조를 그들 자신의 예배 전통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강조에서 개혁주의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즉 세계관과 인생관에 관련된 견해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변혁주의자의 질문은 “어떻게 신자들이 그들 주위의 문화와 연관을 맺을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교회가 문화와 사회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추진할 것인가? 어떻게 교회가 그 주위의 세상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렇게도 흔히 교회를 특징 짓는 고립주의를 피할 것인가?” 등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아래에서의 여섯 개의 단어 또는 구절들은 개혁주의의 이런 방면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다 (빌 2:11)

이 말들은 물론 성경에서 직접 나온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찬양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개혁주의 신자들이 동일한 요점을 말하기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성경 구절은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이 확언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파괴적인 구별을 짓는 이원론에 의하여 물든 현대의 세계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오늘날 북미에서 사람들이 들어 마시는 공기와도 같이 만연된 세속적인 세계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계가 진정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둘로 갈라져 있다고 믿도록 만들려고 한다. 즉 신자들이 그들의 작은 거룩한 세계에서 그들의 작은 예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한 것”이라고 불리는 그 작은 세계에만 적용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별에 대한 대화를 들을 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0-21) 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지도 아래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이원론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이심을 선포한다. 만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제 1문과 이에 대한 답변이라면(즉 “삶과 죽음에서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로인가? 내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우리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모든 것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하지 않을 부분은 1 평방인치도 없다” 이라는 말이다.

2. 하나님의 나라 (마 6:10)

모든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 및 개혁주의의 강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많은 비유를 가르쳤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주재이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스리셨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통치가 단번에 변호되고 확증되었다(골 1:15-20, 엡 1:15-23).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및 미래의 현실이다. 이것은 “이미 지금”(already) 있으면서 또한 “아직 아닌”(not yet)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음을 강조했으며, 그러면서도 또한 앞으로 올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미 지금” 이라는 개념의 열매를 CRC 전반에 걸친 사역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래의 표는 이러한 노력들의 작은 예이다.

–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있는 기독교 대학과 기독교 학교들
– 신체적 및 정신적 불구자인 어린이들을 위한 시카고의 엘림(Elim) 기독교 학교
– 토론토에 있는 사회 정의를 위한 시민 단체(Citizens for Public Justice)
– 미시시피 주 잭슨 시 근교에 있는 지역 개발 단체인 캐리(Cary) 기독교 센터
– 온타리오의 상담소(beginnings Counseling)와 입양 안내소(Adoption Services)
–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의 기독교 병원(Pine Rest Christian Hospital)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노력이다. 이 기관들은 교회보다 크며, 모여진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것들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 통치의 열매이며,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평화, 정의, 그리고 치유의 새로운 질서 중 일부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망 중에 산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패배 뿐만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추방,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그리고 눈물이다 상처, 또는 죽음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이심을 고백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려는 헌신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신자들로 하여금 정의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에 대한 미가의 요청만큼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없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믹 6:8)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이 폭 넓은 사회에의 참여를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강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신자들이 이러한 폭 넓은 분야에서 일하는 가운데 추구하는 것이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신자들이 사는 지역사회 내의 사람들과 그들이 갖는 개인적인 관계에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하며, 정의는 신자들이 어디에서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추구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를 추구하는 예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인종 차별 또는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법이나 행위에 반대하여 싸우는 일
– 범죄를 다루는 기관에서 벌, 재활, 그리고 회복 간에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일
– 인간의 고통, 가난, 및 기아를 덜어주고 사회의 약자들에게 희망과 기회를 주는 정책들을 추구하는 일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성경적인 개념으로서의 정의와 북미의 정치적인 담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정의라는 개념은 종종 아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미 사회에서의 정의는 개인의 권리, 개인에게 자격이 있는 것, 개인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성경에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로서의 인간 개인의 높은 지위에 근거를 둔 개인적 권리에 대한 관심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의로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 관계의 회복, 의와 평화로 이끄는 잘못됨의 교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성경에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나라 및 의와 평화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3. 말씀과 행위 (약 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 2:14-17)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우리를 이내 교회로 인도하듯이,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또한 이내 우리를 교회가 가진 사명의 말과 행위의 본질로 인도한다. 교회의 사명은 말에 해당되는 부분(말씀의 선포)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행위의 부분(행동)을 가지고 있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이심을 선포하며 또한 복지 후원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 교회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요청하면서 또한 난민들이 재정착하는 것을 돕는다.
– 교회는 신자들의 몸을 이루어 나가면서 또한 사회의 정의를 도모한다.
– 교회에는 장로 뿐 아니라 또한 집사도 있다.

말씀과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사역에서 동행한다. 교회는 말씀과 행위의 사역을 구분할 수 없으며, 결코 그들 사이에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4. 문화적 사령

“문화적 사명”은 카이퍼 계통의 개혁주의 집단에서 자주 듣는 용어로서, 이 문화적 사명은 구체적으로 창세기 1:27-28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명령이요,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상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그들의 직무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름을 지을 권세를 포함하여 지구 전체를 다스리는 위치를 주셨는데, 그것은 중요한 의미에서 창조하는 권세였던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시 8:5-6)

여기에서의 요점은 인간이 모든 것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이 피조물을 지배하고 유린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인간은 청지기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큰 세상을 가장 좋게 만들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집을 짓는 자요, 창안자요, 창조자이다!

따라서 문화적 사명은 창조에 대한 힘있는 강조를 동반한다. 그리고 강력한 창조의 교리로부터 직접 흘러 나오는 것 중에 하나는 과학에 대한 인정이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기독교인들이 그러하듯이 과학에(또는 나머지 학문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두 책, 즉 성경과 자연의 책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에 관하여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과학은 자연의 책을 “읽으려는” 체계적인 방편이다. 그리고 과학의 책이 성경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잘못 읽었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두 책을 거듭해서 읽는다. 궁극적으로 이 두 책은 하나님께서 그 둘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모순될 수가 없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청지기의 역할은 문화적 사명, 그리고 이 사명이 가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강조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중대한 책임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라는 말씀을 따라서 신자들은 땅과 환경을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가 좋은 대로 할 수 있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은 인간을 이 세상의 청지기, 보호자, 돌보는 자들로 임명하셨다.

5. 기독교 교육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독교 교육을 강하게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특별히 CRC는 집에서나 교회만이 아니라 교육 기관, 즉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강조해왔다. 그리스도는 모든 학문의 영역을 포함하여 삶 전체의 주이시므로, 모든 교육은 반드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믿음과 학문의 융합에 관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해서 볼 때 어떤 교육의 단계에서도 하나님이 제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과 학문의 모든 방면과 연결시키라는 기독교 교육에 대한 성경의 명령은 아마도 골로새서 1:15-17에서 가장 명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그(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자들에 의하여 시작된 기독교 학교들은 “학문은 그리스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긍정적인 비전 위에 건설된다. 동시에 그들은 공립학교 교육을 반대하지 않는다. 시민으로서의 개혁주의 신자들은 전형적으로 지역사회의 공립 교육체제를 열심히 후원하며, 또한 그들은 기독교 학교들을 지원하고, 학교를 위한 세금을 지지하는 투표를 한다. 그리고 많은 CRC 교회들은 기독교 학교 및 공립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이따금 기독교 학교들이 기독교 교육사회를 보다 넓은 지역사회로부터 고립시켜왔지만, 이러한 고립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사실상 적극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일반은총에 의하여 심지어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교육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모든 사람들의 복지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6. 신자의 소명 (엡 4:1)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주일이나 교회생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소명, 즉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있는 이 세상에서 신자는 시간, 일, 재능, 창조력, 부, 여가 등 그들 삶의 모든 부분을 감사와 순종의 헌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칼빈주의” 라는 말을 듣는 즉시 일을 열심히 하고 정직하게 하는, 그리고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갖는 “칼빈주의의 직업윤리”를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직업윤리는 모든 인간의 직업(그것을 직업, 경력, 또는 소명으로 부르든, 고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나 단순한 일이나, 보수가 많은 것이나 보수가 없는 것이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요, 땅을 지배하라는 하나님의 지시와 자신을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완수하는 일의 일부라는 칼빈주의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상의 일 넘어선,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인 이해는 사업, 전문직, 노동, 가사, 공공 지역사회의 기관, 자원단체, 교육, 과학, 산업, 농사, 그리고 정부기관 등에서 강하고도 의식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의 소명에 대한 강조는 CRC가 그 안의 철학부터 물리학, 생물학에서 기업경영에 이르는 모든 방면의 학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인 기독교 인문 교육을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건전한 기독교 소명관은 또한 강한 청지기 의식,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시간, 재능, 자원 및 부를 지혜롭게 사용하려는 결단을 장려하게 된다.

앞에서 이 세 가지, 즉 교리주의자, 경건주의자, 그리고 변혁주의자의 강조는 CRC 내에서 특징적인 접근방법 또는 정신으로써 기능을 해왔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잘 균형된 신자의 삶과 신학은 이 모든 세 가지가 융합된 강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교리주의자의 강조는 그 자체만으로는 배타성과 게으름으로 이끌 수 있으며, 경건주의자의 강조는 그 자체만으로는 개인주의와 기독교의 폭 넓은 차원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고, 변혁주의자의 강조는 그 자체만으로는 기독교와 악한 자와의 대립관계를 약화시키는 지나친 포용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각 강조는 그 자체만으로는 자만심과 다른 두 개의 강조를 무자비하게 격하시키게 되는 경향이 있다. 건전한 사역을 위한 하나의 열쇠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융화되고, 전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정체성 선언문이 서술적인 것인가 또는 규범적인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정체성 선언이 CRC가 무엇인가를 서술하고 있는가, 아니면 CRC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가? 그 답은 양쪽 모두이라는 것이다. 이 정체성 선언은 개혁주의 신앙이 그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에 대한 서술이요, 또한 보다 더 완전하게 이러한 성경적인 비전을 따라서 살라는 열정적인 요청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기도했듯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주사 그리스도를 알게”(엡 1:17) 하시기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