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47-56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가롯 유다의 인도로 인해 예수님을 체포하는 상황 같지만 이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잠든 제자들을 버려두고 도망가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잠든 제자들을 깨워 예수님을 파는 자에게로 가셨습니다. 가롯 유다는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효과적으로 체포하기 위해 무리들과 미리 비밀 신호를 짜고 예수님께 입을 맞추고 또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가증 스러운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증스러운 행동을 보시고도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3절과 22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두 비유들을 말씀하실 때 친구여 라는 호칭을 쓰시며 책망을 하는 것을 볼때 이 말씀 또한 예수님을 파는 가롯 유다에게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롯 유다와 함께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자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귀를 떨어 뜨립니다. 그 때 예수님은 두가지의 교훈을 다시금 상기 시켜 주십니다. 칼을 잡는 자들은 모두 칼로 망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두번째는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력을 쓰려고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무력적인 도움이 필요한 무기력한 희생자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것은 그것을 피하거나 저항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붙잡히시기로 스스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설명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을 운명을 피할 수도 있었고 초자연적 능력을 사용하여 저항할 수도 있었지만 그 모든 기회와 능력들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이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성취하시기 위함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56절에 다시한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다시금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신다고 선언하시는데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하신 대로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메시야로 예수님을 기대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무력한 예수님을 보고 도망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과 제가 열두 제자였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때에 저희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나는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시겠지만 저희들은 열두 제자들과 똑같은 자들입니다. 똑같이 죄인들이고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이 배반하고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러 잡히셨습니다. 저희들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고 순순히 체포 당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이며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다시금 기억하고 감사하시며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시고 성실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